[Text]예술과 일상의 경계에선 사물로서 조각

[Text]예술과 일상의 경계에선 사물로서 조각

 

조경진 (연구교수, 비평)

 

철학에서 사물 철학이 있다면, 예술의 맥락에서는 사물 미학이 있다. 사물 철학은 한 사물이 우리 인간이 아는 것 이상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해 인간과 사물의 관계, 사물 자체를 재정립하려 한다. 반면 예술은 철학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대해 왔으며, 사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느낌을 유포해 왔다. 철학이 사물들을 공통감과 양식에 의해 사유해 왔다면, 예술은 오히려 그런 감각을 파괴하고 사물에 대한 낯선 감각들을 조장했다. 우리는 고흐의 신발과 침대 그림에서, 뒤샹의 변기에서, 초현실주의의 언캐니에서, 마그리트의 신발 그림에서 그런 감각들을 느껴 왔다. 올덴버그의 햄버거나 워홀의 캠벨 스프에서도 그랬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주로 사물의 맥락성을 뒤틀어 아이러니를 만들었고, 사물의 고정된 본질과 의미를 불안정하게 부유하도록 했다. 사실, 이런 일은 예술이 본래 사물의 일상성을 중지하고, 사물과 사물을 새로운 은유로 연결하는 일을 해왔기에 이미 예술 안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각 예술 활동에서 사물을 대하는 태도, 사물을 예술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특히 후자가 중요한 데 바로 거기서 예술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무엇인지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방식과 태도가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사물에 새 생명을 부여해 온 김승현의 작업도 그렇게 접근해야 한다.

 

동시대 작업들에선 사물에 대한 다른 태도는 물론 예술적으로 처리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나타나고 있다. 김승현의 작업은 그런 부류와 맥을 같이 하면서 그만의 미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 방식을 간단히 살피고, 김승현은 또 어떻게 그것과 달리 하는지 살피면 그의 태도가 무엇인지, 그의 언어의 미적 가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이번 《용도를 잃은 사물들》(2025)展에선 ‘버려진 가구’나 다양한 기성 사물, 공원 묘지에서 수집된 ‘조화’를 집적하고 연결하는 방식으로 선보였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머시 중헌디’라는 감각을 가지고 산다. 나아가 존재론적으로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왜 지금 여기에서 어떤 것이 선택되었는지는 소위 ‘중요성의 감각’이라는 존재론적 태도에서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바로 가치가 있고, 가치의 우선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예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주의attention’였다. 예술은 우리가 주의하지 못 했던 것들을 무대에 올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내게 하고 우리를 그것에 주의하게 했다.

 

그러니까, 김승현이 버려진 가구나 버려진 조화를 가져왔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말을 해 준다. 그는 우선 사물을 특정한 인간적 용도나 기능으로 보는 관점, 특히 사물들이 자본주의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에 저항한다. 오늘날 대부분 사물은 인간중심주의적 관점,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설사 사물들이 인간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한낱 기능이나 용도로 환원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사물을 만들 때, 시간 대비 비용, 인풋 대비 아웃풋의 효율, 소비자의 지갑 사정을 변수로 고려한다. 사물이 사용되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물이 버려지는 것도 바로 이유에서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이윤 창출을 위해 기존의 상품 사물들이 버려지기를 바란다. 김승현은 사물의 이런 삶, 이런 순환 싸이클에 실존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사실, 우리는 공원묘지에서 버려진 조화를 봐도 그것이 당연한 그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사물들은 낡았다는 이유로 버리고 새 것으로 사려고 한다. 오래된 것도 쓸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진보적 가치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새로움의 가치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이념이 유포한 새로움의 신화다.

 

예술가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가 중요하다. 단지 저항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다. 어떻게 저항하는지가 중요하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가 중요하다. 힌트는 우선 그의 말에 있다. 그는 공원 묘지에 방문했던 때의 일을 이렇게 술회한다. “공원묘지에 폐기하려고 모아놓은 조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내 시야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순간이 있다.”(작가노트, 2025) 하이데거는 한 사물의 존재가 일상적 용도성의 중지에서 나타난다고 말한 바 있다. 사물은 한낱 눈앞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손안에 있고 더 깊은 존재 연관 속에 있다. 사물의 존재는 세계(역사와 문화)와 대지 안의 존재 연관이다. 고흐의 신발 작품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야기는 예술이 어떻게 존재의 그러한 진리를 개시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김승현도 용도성이 폐기된 사물의 상태에 매혹됐다. 그리고 그도 한편으로는 사물들에서 “사물이 가진 시간과 흔적,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물의 존재, 사물이 간직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흔적, 즉 세계와 대지의 존재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그의 사물들에 갖는 한 태도와 관점을 나타낼 뿐이다. 그는 하이데거를 반복하고 싶어 하는가? 하이데거의 사물은 사실 다분히 인간중심적이고 현존재인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고흐의 신발에서도 결국 농부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던가. 그를 사로잡은 게 단순히 폐기된 사물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폐기되었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바로 그러한 존재 방식의 사물에 끌렸다. 단지 사물의 존재가 아니라, 사물의 물리적 응집이 김승현을 자극한 것이다. 한 사물과 사물의 응집은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수십 조개인 것과 우리가 인간 객체인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일이다. 이는 창발의 원리에서 이미 말해져 왔다. 세계는 단지 부분적 구성요소이나 그것의 단순한 합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김승현은 단지 사물의 존재, 다른 차원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달리 존재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근본적인 잠재력, 사물의 힘을 끌어내려 한다. 사물은 고정된 속성이나 형태가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 아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김승현이 공원묘지에서 본 것은 자본주의적 사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물의 본래적 가능성, 사물의 다른 존재 방식, 사물의 힘이다. 특히 그는 그것을 사물의 응집에서 보았다. 사물은 응집하면서 그 자체로 다른 군집적 개체성을 갖는다.

 

실제로 그의 이번 전시에서 사물들은 자신의 흔적이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김승현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사물들은 자신 안에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흔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과 다른 사물에게 남긴 흔적으로도 존재한다. 김승현은 이 후자의 경험에 더 끌렸고, 그것을 사물의 진정한 존재, 즉 사물의 힘으로 감각한다. 사물은 단지 무엇으로서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 힘과 그 잠재성으로 존재한다. 그는 바로 이 관점에서 이번 전시에서도 사물에게 역사성이나 맥락을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단지 어떤 힘을 부여하려고 했다. 메인 설치 작업은 바닥에 높지 않게 뿌려진 조화와 다수의 의자를 함께 배치한 것이다. 그 중앙엔 나무 기둥 같은 형태가 있고, 거기에선 나뭇가지 같은 형태로 조화를 길게 엮어 만든 구조물이 전시장의 천장 반 정도를 여러 방향으로 가로지른다. 우리는 이 작업에서 이것들이 추모공원에서 가져온 조화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그런 맥락을 알 수 있도록 배치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있는 나무처럼 가지를 뻗친다. 그 형태는 고흐의 신발이 고흐와 신발의 존재를 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따른다. 그것은 히르슈호른처럼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 사물들의 역습, 그 압력을 실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반대로 원래 사물의 맥락을 보이거나, 거기에 매이려 하지 않는다. 그에겐 그 또한 사물의 힘과 잠재력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환원하는 것, 우리의 맥락으로 환원해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버린 사물들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물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다른 것으로 존재할 수 있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버려진 액자에 조화, 투명 볼, 오래된 전화기 등을 배치해 마치 예술작품처럼 보이게 한 〈Re: Time〉(2025) 연작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것은 예술작품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작품처럼 보이기엔 다소 투박하게 만들어져 있다. 예술인 것처럼 예술의 형식을 빌어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술작품으로 물화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과 사물의 묘한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사물이 예술작품이 되게 하면서도, 그 사물이 예술작품으로 굳어지고 확정되는 것, 나아가 예술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예술작품이라는 사물과 그 힘을 바로 그러한 틀로 제한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래서, 그 결과 액자를 예술의 제도적 프레임이 아니라, 사물들이 응집되는 틀로서만 사용하려 한다. 그는 그에게 사물이 다가와 ‘역전이 되는 순간’ 그 자체를 향유한다. 그에게 사물들은 스스로 활력 있고, 새로운 삶과 존재 방식으로, 새로운 힘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보일 만큼 찬란하면 된다. 이번 전시의 작업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온전히 완결되지 않은 상태, 완벽히 다듬어지지 않는 상태의 형식들로 나타난다. 근본적으로, 이는 그가 사물을 한낱, 외적 형태, 속성, 인간적 의미나 사회적 맥락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잠재된 하나의 힘 그 자체로 대하려는 태도가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힘 자체는 사물들이 예술작품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그 역사성과 사회성이 드러난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는 사물의 여백이다. 김승현의 예술은 바로 이 틈을 공략하고 사물을 그러한 중립적 지위에 놓으려 한다는 데서 특별하다. 김승현은 그것이 사물을 일상적 사물과 예술의 경계 어디에 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승현 개인전 《용도를 잃은 사물들》(2025, 인사아트센터 충북갤러리) 전자도록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