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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현존의 아상블라주: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진동하기 

 

 

김보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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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은 일상 사물이나 이미지를 모아서 쌓는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대신 본래 있는 것을 조합하여 형태를 구축하고 섬세하게 조율한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제작보다는 조립 또는 배치에 가깝다. 미술사적으로 아상블라주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콜라주를 확장한 개념인 아상블라주는 1950년대 중반 이후 부활한 다다(Dada), 다시 말해 네오다다와 누보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의 방법론을 가리킨다. 상품이 넘치는 소비자본주의를 경험한 첫 번째 세대였을 당시의 미술가들은 아상블라주를 통해 일상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하고 전후추상의 주관적 미학을 넘어서고자 했다.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밝힌 바대로 저자성(authorship)이라는 개념이 극복되면 예술가는 공동 생산물의 수집가(collector)가 된다(부리오, 2022: 97). 부리오가 이미 2000년대 초 저서에서 썼듯이 전 지구적 과잉생산 생태계에서 예술가는 DJ 혹은 웹 서퍼처럼 활동한다. 김승현 역시 부리오가 말한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그림 2]












현실의 평범한 사물이나 이미지를 집적하여 입체·설치와 평면 작업으로 구현하는 김승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 발견술이다. 작품에 대형 빗자루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계기도 발견의 순간에서 비롯되었다. 작업실에 세워져 있는 플라스틱 빗자루가 불현듯 시선을 붙든 것이다. 늘 일상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빗자루가 초록빛을 발하는 듯 강렬히 다가온 그 날 이후 작가는 빗자루, 먼지떨이 등 청소 용구를 모아 <Circle>과 <Plastic World> 연작을 진행하기에 이른다([그림 1]). 그런가 하면 2023년 작품부터 등장한 조화(造花)는 작업실 인근 추모공원에서 발견한 오브제다([그림 2]).

 

대형 플라스틱 빗자루를 작품에 처음 도입한 사례로 《강원키즈트리엔날레2020》 출품작을 들 수 있지만, 주요 재료로 활용한 것은 2021년부터다. ‘빗자루로 원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는 개인전 《낯선 우아함(Unfamiliar Elegance)》(2021)의 설치작업을 통해 우리는 매일 사용하는 물건의 색채와 형태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작가의 접근 태도를 확인한다. 일상 사물을 작품에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승현은 개념미술의 선구자 뒤샹의 후예다. 그러나 미적 구성과 조합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뒤샹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뷰에서 작업 과정 중 장소 특정성에 대한 고려보다 오브제 자체의 형태와 색채의 구성에 비중을 두는 편이라고 밝힌 작가의 발언은 비평가 핼 포스터(Hal Foster)가 사라 제(Sarah Sze)의 작품을 분석하며 ‘site-sensitive’라고 평한 내용을 연상시킨다. 포스터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와 사라 제를 비교하면서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인 세라의 조각에 비해 작품이 위치한 장소에 적응하면서도 그 안에서 절반은 자율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제의 구축물들은 장소에 민감하다고 보았던 것이다(포스터, 2022: 209). 제와 유사하게 김승현은 자체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공간에 어우러지는 작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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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이 사물을 집적하는 방식을 시작한 시점은 2017년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바닥에 놓인 거대한 사무라이 투구 형상을 수많은 인형으로 덮은 작품과 인형을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쌓아 올린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인형으로 가려진 투구 앞에서 감상자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장식 일부를 통해 투구의 전체적 형태나 크기를 가늠하는가 하면 소소한 힘들이 모여 거대 권력을 압도하는듯한 통쾌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탑처럼 쌓인 또 다른 인형 설치 작품도 작은 것이 모여 형성하는 커다란 힘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앞의 작업과 상통한다. 그러나 동시에 뜯겨 나온 솜과 인형이 엉켜있는 모습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작품의 주재료인 인형에 담긴 시간성을 전달하면서 내부에 숨겨져 있던 것이 겉으로 드러나 버린 역전의 현상을 제시한다. 작가가 오랫동안 관심 가져온 은폐와 노출이라는 주제의 구현이다. 김승현의 오브제 설치작업에서 보이는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 강렬한 에너지로, 은폐와 노출, 집중과 확산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방향성을 통해 긴장감이 유지된다. 다시 말해 수렴을 통해 응축되는 힘과 생생하고 활기차게 뻗어 나가는 힘을 동시에 보여준다. 대비를 이루는 표현은 그동안 김승현이 작성한 작가 노트나 작품 제목에서도 발견된다. 구체적 예로 제목에서 확인되는 ‘camouflaged’와 ‘revealer’, ‘가장’이나 ‘치장’과 ‘드러냄’ 등을 들 수 있다.

[그림 3]
[그림 4]


빗자루나 먼지떨이, 조화로 구성된 형태는 어디론가 향하는 방향성을 지닌 채 휘몰아쳐 나아가거나 힘있게 수직 상승하는 구조로 제시된다. 여러 개의 오브제가 합쳐서 강력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빗자루들이 모여 한 방향으로 향해 가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팔을 뻗고 있는 강한 염원을 담은 인간 형상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전시 《낯선 우아함》(2021)에서 벽에 걸린 반구 형태를 향해 위로 솟아오르는 빗자루들이 이어졌다면([그림 3]), 작품 <plastic world: circle>(2023)에서는 전시장 출입구를 향해 빠져나가려는 먼지떨이의 긴 행렬이 보인다([그림 4]). 9 미터에 달하는 움직임의 형태는 일찍이 화가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가 우아함의 표현으로 주목했던 사행선(蛇行線)을 그리며 나아간다. 그런가 하면 동부창고 설치작업인 <Plastic World>(2022)의 경우 빗자루들이 천장 중앙의 원형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그림 5]). 이렇듯 바닥의 원형에서 위로 솟아오르고, 원형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거나, 원형을 향해 가는 힘 있는 구성을 통해 작가는 일상의 미미한 물건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말 그대로 ‘사물들의 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림 5]

생명은 생동하고 유동적이며 잠재적이다. ‘대상’이 고정된 것으로서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들의 되기(becoming)가 인간이 식별할 수 없는 수준과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공간의 연장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물질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강도라는 비실체성과 변별성의 개념을 갖고 살아가는 일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살아가기 위해 인간은 세계를 일련의 고정된 대상들로 환원시켜 해석해야 하고, 이러한 부분이 물질적이라는 단어에 할당된 수사학적 역할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베넷, 2020: 150~157). 그러나 김승현은 이 방향성을 뒤집는다. 말하자면 고정된 대상에 흐름을 부여하고 사물이 가능한 힘 있게 발화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평범하고 낯익은 사물이 ‘낯선 우아함’의 형태로 탈바꿈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김승현에 의해 활력이 더해진 사물은 다시 인간에게 생기를 전달한다.

 

미술비평가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은 “출구 없음: 레디메이드와 비디오(No Exit: Video and the Readymade)”(2007)에서 레디메이드의 계보학을 고찰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물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object)’를 제시한 뒤샹 이래로 레디메이드 그림을 손으로 그린 재스퍼 존스의 ‘행위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action)’, 전자와 양성자를 조작한 백남준의 ‘네트워크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network)’가 이어진다. 나아가 조슬릿은 ‘일종의 인간 레디메이드’의 등장을 예견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Joselit, 2007: 37~45 참조). 나는 조슬릿의 논의에 기대어 김승현의 작업을 ‘퍼포먼스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performance)’ 또는 ‘행위주체성으로서 레디메이드(readymade as agency)’라고 칭하고자 한다. 빗자루나 먼지떨이 등으로 구성된 설치를 통해 사물에 수행성(performativity)을 부여한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태양처럼 보이는 원 형태를 향하거나 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대한 선형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기획전시 《재생버튼(Re: play)》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버려진 것들을 쓸어내는 대신 공중 곡예를 넘듯 군무를 펼치는 플라스틱 청소도구들”이라는 언급 역시 김승현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전의 <Camouflage> 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주제와 형식 면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엿보이기에 ‘행위주체성으로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김승현의 작업 속에서 자연과 문화, 인간과 사물을 가르는 이분법은 희미해진다. 인간과 다른 물질성 사이의 관계를 보다 수평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보다 생태학적인 감수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베넷, 2020: 53).


 

[그림 6]

한편 김승현이 입체와 평면을 오가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화가 에이미 실먼(Amy Sillman)이 작업실을 이원화하여 캔버스 회화를 위한 스튜디오와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업 공간을 오가는 것처럼 김승현의 작업실도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오브제를 활용한 입체 설치를 위한 공간, 다른 하나는 평면 작업을 위한 공간이다. 예전부터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종이에 펜이나 아크릴로 다양한 드로잉을 진행해왔다. ‘디지털 콜라주’ 작품은 202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의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조합하여 이루어진다. 포토샵 프로그램을 통해 스케일과 색상 변환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테면 작품 <Circle-002>([그림 6])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록 빗자루들이 핑크색으로 전환되고 크기가 축소되거나 허공에 흩어져 있으며 그림자가 더해져 공간감을 창출하기도 한다. 사각형 프레임 안에 제한된 작업이지만 컴퓨터 처리 과정을 거침으로써 실제 공간 설치에서보다 오히려 더 자유자재로 변경, 배치될 수 있는 표현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빗자루인가? 일찍이 <부러진 팔에 앞서(In Advance of the Broken Arm)>(1915/1964)라는 제목으로 제설용 삽을 선보인 뒤샹 이후 청소도구를 레디메이드로 제시했던 몇몇 작품이 떠오른다. 김구림의 <빗자루와 걸레>(1969)나 김범의 <무제(지평선 위의 업무)>(2005) 작업이 그 대표 사례다. 물론 김승현의 작업은 사물의 조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아무런 가공 없이 여러 개를 집적시켰다는 점에서 앞선 작업들과 뚜렷한 차별점을 지닌다. 오브제 선택의 기준에 대한 질문에 작가는 특별한 의도는 없다고 답했지만 최근작에 도입되고 있는 빗자루, 먼지떨이, 쓰레받기, 조화 등은 이른바 미화(美化) 활동에 쓰이는 인공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그림 7]). 어딘가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서 또는 무언가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면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인 것이다. 작가는 무엇보다 우리나라 공산품의 선명한 색상에 끌린다고 했다. 2019년 개인전 《가려진 나·가리는 나 camouflaged》에서 제품을 감싸고 보호하는 포장 상자가 작품의 소재로 쓰인 바 있다면([그림 8]), 최근 작업에서는 지저분한 것들을 제거하고 먼지를 벗겨내는 데 사용되는 청소도구가 오브제로 선택되고 있다는 차이점이 보여 흥미롭다.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가리는 방법보다는 드러내는 쪽을 택하여 그 의미를 더하고 싶다’라고 했던 작가의 입장이 암암리에 투영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림 8]

[그림 7]












작가는 줄곧 일상 사물이 지닌 형태와 색채에 대한 본인의 관심을 밝히고 있지만, 오브제에 담긴 심리적 의미는 없을까? 뚜렷한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오브제 선택에 있어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았을지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작업에 활용해온 인형, 투구, 청소도구, 조화 등을 떠올려볼 때 감상자로서 그 숨겨진 의미를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위니코트(D. W. Winnicott, 1896~1971)에 의하면 예술은 항상 다른 무언가를 대신하는 이행 기능(transitional function)을 수행한다. 위니코트의 이론에 따라 김승현 역시 자신과 연관된 물건을 오브제로 선택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폴리우레탄으로 덮은 착종된 이미지를 제시한 <Camouflage> 시리즈는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페르소나’ 개념, 즉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나 외적 자아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렇듯 김승현의 작업에서 물질은 자아의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며 내외부를 넘나든다. 물질은 자아의 안과 밖에서 작동하는 생기(vitality)로 간주할 수 있다(베넷, 2020: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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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재료를 대하는 예술가의 진실하고 열정적인 태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

 


[그림 9]

앞서 언급했듯 2021년 이후 오브제 설치작업에서 확인되는 무엇보다 큰 변화는 사물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승현은 이전 작업인 <Camouflage> 또는 <Camouflaged> 연작에서 이미 장난감, 플라스틱 용기 등 일상 사물을 집적시키거나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했으나 대부분 금색이나 은색 우레탄 안료로 덮어 오브제를 은폐했다([그림 9]). 그에 비해 빗자루, 먼지떨이 등을 활용한 최근작에서는 재료를 날 것으로 노출한다. 형태를 구축하기 위해 일종의 뼈대로 활용되는 각목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원형 또는 원형을 향해 맹렬하게 나아가는 힘 있는 선적 구성을 보여줄 뿐,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대로 ‘가리는 방법보다는 드러내는 쪽’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진실스럽다(Beauty is truthy)”(모튼, 2023: 59)는 의미일까. 전체적으로 보아 꾸밈으로부터 벗어나 실제 자체로, 구심적 형태로부터 원심적 배치로 향해 가는 변화가 확인된다.

[그림 10]


다만 이전 <Camouflage> 연작에서부터 보이는 일관된 특징은 인간과 사물을 연결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예를 들어 콜라주 작업 <Camouflaged 008>(2019, [그림 10])은 인물 사진에 구두, 가방, 갓난아기 사진을 접합한 것이다. 자동차, 반지, 화장품으로 덮인 인물 머리 위로 구두와 아기가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간다. 김승현의 이미지 조합은 또한 부리오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형식이자 내용이며, 주체이자 객체이고, 자연이자 문화인 전체성 속의 물질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한 내용과도 연결해 볼 수 있는 것이다(부리오, 2023: 47). 주체를 환경과 독립된 자율적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경계가 조금이라도 침해당할 때 그 무엇도 자아의 완전한 해체를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확립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인간을 분산 시스템의 일부로 보면 인간 역량의 완전한 실현이 접합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접합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발적이고 의식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으며 혼돈스러운 세상과 동떨어진 지배와 제어의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나와서 그 세상과 통합된다(헤일스, 2013: 508~509).

 

“내가 해야 할 일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말하는 김승현에게 예술은 무엇보다 변환을 의미한다. 그는 시선과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일상용품을 미적 오브제로, 소소한 사물을 거대한 집적물로, 보잘 것 없는 대상을 강렬한 에너지 덩어리로 바꾼다. 미미한 사물이 응축 또는 확산의 형태로 합쳐져 어떻게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 ‘역전이 주는 즐거움’(작가 노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동안 ‘위장’이란 주제에 천착했던 그는 일상 오브제의 색과 형태 자체에 집중한 ‘플라스틱 세계’로 이동했고 이제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단계다. 오브제 설치와 디지털 평면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김승현은 전 지구적 전염병 이후 많은 활동이 급격하게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진 상황에서도 물성이 갖는 매력과 물리적 공간에서의 신체 경험을 간과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는 자아와 사물,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예술의 본질과 조형에 대한 탐구를 이어갈 것이다. 열정적 도전 정신의 작가 김승현이 전개할 ‘현존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of presence)’를 기대한다.


2024, 김보라

 

 

참고문헌

 

모튼, 티머시(Morton, Timothy). 2023.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앨피.

베넷, 제인(Jane Bennett). 2020.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연구.

부리오, 니콜라(Nicolas Bourriaud). 2016. 『포스트프로덕션』. 정연심·손부경 옮김. 그레파이트 온 핑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2. 『엑스폼』. 정은영·김일지 옮김. 현실문화연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 『플래닛 B. 기후 변화 그리고 새로운 숭고』. 김한

들·노태은·안소현 옮김. 이안북스.

포스터, 핼(Hal Foster). 2022. 『소극 다음은 무엇?』. 조주연 옮김. 워크룸프레스.

헤일스, 캐서린(Katherine Hayles). 2013.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허진 옮김. 플래닛.

정은영. 2023. “재생버튼: 폐기된 존재들의 귀환을 위한 리-플레이”. http://www.kwanhoongallery.com/?c=exhibiton&s=2&syear=2023&gp=1&gbn=viewok&ix=232(검색일: 2023.11.25).

Joselit, David. Winter 2007. “No Exit: Video and the Readymade.” October 119, pp. 37-45; 「출구 없음: 비디오와 레디메이드」. 김영인 옮김. http://tigersprung.org/?p=2066(검색일: 2023.11.20).











[Text]플라스틱 세계
 
한의정 (미술평론가, 충북대학교 교수)

plastic world: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세계

 

플라스틱은 열이나 압력을 가해 일정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고분자 화합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생겨난 지 150년도 되지 않는 이 재료는 편리한 가공성, 낮은 가격, 탁월한 소재 특성으로 인해 금속, 석재, 나무와 같은 고전적인 재료를 빠르게 대체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하는 필름, 합성섬유, 병, 튜브, 장난감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부터 고내열, 고강도 재료를 요구하는 각종 장비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인류의 역사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지나 현재 플라스틱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플라스틱 제품의 폭발적인 사용량만큼 버려지는 양도 많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사용되는 수많은 일회용품들은 거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너도나도 편리하게 쓰고 쉽게 버리고 있다. 아무리 분리배출을 잘 한다고 해도 재활용되는 플라스틱은 9%에 불과하다고 한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땅에 묻어도 썩지 않고, 태우면 다이옥신이나 염화수소 같은 가스를 뿜어내며, 바다로 떠내려간 플라스틱 쓰레기는 거대한 섬을 만들거나 미세플라스틱으로 바다생물의 몸에, 그리고 인간의 몸속에 다시 도달하게 된다. 최근 기후위기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시각에서 인간이 만들어내고 배출하고 있는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김승현은 이렇게 쉽게 쓰고 버려지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플라스틱 재료를 가지고 ‘플라스틱 세계’를 만든다. 플라스틱을 다루되 직접적으로 환경문제를 말하거나 에코아트를 시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작가의 거주지 주변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버려진 것들(things)을 주워와 이리저리 이어붙이고,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간직해 온 피규어들이나 작은 오브제들을 ‘재활용’(recycling)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든 ‘플라스틱 세계’를 단순히 작품재료를 가리키는 용어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김승현은 오히려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이 가진 내재적 성질, 특정한 물성에 집중하여 작품을 제작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플라스틱의 성질을 ‘플라스틱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와 질감으로 광범위하게 편재되어 우리 눈에 띄지 않는 ‘지각불가능성’(imperceptibility)을 가지며, 자연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무한 ‘증식’(proliferation)하고, 이 지구상 생태계에 ‘축적’(accumulation)된다는 속성을 갖는다(Heather Davis, “Impercerptibility and Accumulation: Political Strategies of Plastic”, in: Camera Obscura, vol. 31, no. 2(2016), pp. 186-193). 우리는 김승현의 작품에서 이러한 플라스틱성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보통 쉽게 지나쳐버리는 사물들, 수명을 다해 버려진 사물들이 김승현의 플라스틱 세계에는 각각의 자리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이들이 미세플라스틱처럼 땅에 파묻어도 바다에 떠내려 보내도 돌고 돌아 다시 우리 몸에 축적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면, 오히려 이들과 ‘낯선 동맹’을 맺어보자고 제안한다. 이 낯선 동맹의 방식은 우리가 다시 plastic이란 단어의 다른 뜻에 주목할 때 더 잘 설명된다.

 

plastic world: 마음대로 변형가능한 세계

 

plastic이란 형용사는 어떤 힘을 가했을 때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성질, 즉 가소성(可塑性)이 좋음을 뜻하기도 한다. 진흙과 같이 쉽게 모양을 빚어낼 수 있는 물질에도 plastic이라는 성질을 붙인다. 그래서 각종 재료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어내는 예술, 조형(造形)예술을 ‘plastic arts’로 표기한다.

 

김승현은 예술이 갖고 있는 이러한 조형성(plasticité)을 자유자재로 빚어내는 데 강점을 갖고 있다. 기존의 <위장 Camouflage> 연작에서는 투구 위에 작은 피규어들을 한껏 집적하는 방식으로 본래보다 더욱 위협적인 형상들을 만들어냈다. <가려진 나, 가리는 나 Camouflaged> 연작에서는 얼굴 사진 위에 각종 오브제 사진들이 붙고 연결되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자라나거나, 실제 버려진 사물 오브제들이 연결, 접속되며 나의 얼굴을 완전히 대체하는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의 관점에 따르면, 동물이나 곤충들에서 나타나는 변장(disguise), 위장(camouflage), 위협(intimidation)과 같은 미미크리(mimicry, 擬態) 행위는 인간의 미메시스(mimesis), 즉 그림 그리는 행위와 유사점이 있다. 굳이 생존 투쟁의 이유가 아니어도, 하등동물과 곤충,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다른 것처럼 보이도록 자신의 겉모습을 디자인한다는 것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그림을 저 멀리서 나를 응시하는 힘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 규정하며, ‘진짜 나’와 ‘가짜 나’의 분리 현상까지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승현의 이전 작업들은 작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피규어 장난감이든, 작가의 현재 삶을 둘러싼 수많은 버려진 물건들이든, 사물들로 구성된 ‘가상의 나’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2022년 청주창작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낯선 우아함> 작업에서 작가는 ‘가짜 나 만들기’ 또는 ‘진짜 나 가리기’에서 벗어나 진짜든 가짜든 ‘나’를 이루고 있는, 나와는 이질적인 ‘사물’로 직접적인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과 인접하거나 덧대지면서 인간+사물의 혼종의 양상을 보였던 것들(things)이 이제 독립적인 하나의 표현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플라스틱 세계에서 모든 사물이 원래 형상 그대로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김승현은 원재료가 갖고 있는 형상에서 다른 형상이 솟아나도록 외부에서 힘을 가한다. 덧붙이거나 분리하는 힘이 가해졌을 때, 플라스틱과 같은 재료들이 갖고 있던 잠재적 형상은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번 <낯선 우아함> 작업은 작가가 밝히듯 “빗자루로 원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빗자루는 원래의 길고 뻣뻣한 성질을 버리지 않고도 거대한 원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초록색 빗자루 원에 압도당하면서도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받는다.

 

plastic world: 인공적 조형의 세계

 

이 기이한 낯섦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물의 ‘용도변경’에서 비롯된다. 빗자루와 먼지떨이와 같은 청소도구들 본래의 용도는 쓰레기나 먼지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아무리 화려한 형형색색을 띠고 있더라도 그 임무를 다하면 우리의 관심과 시야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물들의 지위는 오랫동안 그렇게 취급되어 왔다. 사물은 인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인공적 사물을 자연의 성질과 비교할 때는 불순물이 섞인 합성물로 저급하게 여겨진 것이다. 특히 인간을 위해 사용된다는 ‘도구성’이 사라지게 되면 더 이상 사물은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대로, 도구존재로서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도구성을 상실한 예술작품 안에서이다. 도구가 더 이상 도구로 기능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물이 거기에 있음을 지각하고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낯선 우아함》전에 등장한 빗자루들은 빗자루질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형태와 색채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벽에 부착되어 크리스마스트리가 되기도 하고, 허공에 매달려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유동적인 흐름(flux)이 되기도 한다. 먼지 하나 묻히지 않은 먼지떨이는 천정에 고정되어 샹들리에가 되기도 하고, 시멘트 벽에서 피어나는 알록달록한 꽃봉우리 형상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용도변경’이 실제 다른 도구성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플라스틱 세계 안에서 폭신한 샹들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으며, 오색찬란한 꽃에서는 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빗자루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형상들을 상상하는 놀이에 동참한다. 작가가 디지털 평면 작업을 통해 다양한 생성의 지도를 그렸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인공적 조형물을 생성해내는 과정에서 도구들은 부품별로 분리되거나 해체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의 탄생에 기여하지 못하고 남겨진 조각들마저 버려지지 않고 다시 그대로 ‘오브제 태피스트리’의 형태로 벽에 부착된다. 부품들은 조각조각 떨어진 상태에서 더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듯하다.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형상을 조직적으로 만들어나갈 때와 달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인 조각들은 옆에 있는 다른 재료 조각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작가는 인간의 망각 속에 놓여 있거나, 인간의 도구성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인간에게 폐기된 사물들이 고유의 목소리와 모습을 드러내도록 의도하고 있다.

 

plastic world: 아름다운 사물의 세계


다양한
형상들(figures) 집적되고(assemblé), 이접되어(disjuncté) 솟아나는 다른 형상(Figure) 우리에게 기이하고 낯선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프랑스어로 plastique이라 하면멋진, 아름다운 뜻도 있다. 이미 프로이트(Sigmund Freud) 오래 언캐니(uncanny) 이론에서 설명했듯, 기이하고 낯선 것이 우리에게 매혹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안에 내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승현의 플라스틱 세계에서 인간 얼굴이 줄줄이 사물을 낳는 장면에 마음이 끌려도, 싸구려 키치스러운 일상용품이 위대한 숭배의 대상처럼 성큼 다가와도 놀랄 필요는 없다. 김승현 작품의매혹 말하는 것은, 플라스틱 시대의 플라스틱 세계에는 인간과 사물이 위계를 설정하지 않고, 서로 동맹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이한 동맹관계는 역설적으로 사물들이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었으며 그것들이 인간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승현의 플라스틱 세계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사물들의 예술 표현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주며,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무용한 것이라 여겨진 것들, 망각된 것들의 미학을 대변한다. 


2022, 한의정





 

 

 

[Text]그래서 어떻게 살아계시나요?


이주희 (미술평론가)


살려고 보니, 살아가려고 보니 마주치는 질문들.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어서 끈질기게 살을 쪼아대고 정신을 갉아먹는 그러한 생각들. 우울도 환희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해 뛰어들고자, 잘 버텨내고자 했던 여러 순간들. 다가오는 것도 떠나가는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인연들. 이것들과 마주하는 ‘나’의 나약함과 이렇게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본들, 의연하게 대해본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삶이라는 아득함마저. “인간이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 이유가 있을까?(들뢰즈)” 문학·미술·음악 등의 장르적인 고민은 둘째로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딛고 기록하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중에 삶이라는 머쓱함이 있다. 이 머쓱함에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김승현의 살갗이다.

김승현은 살갗을 만든다. 투구이자 껍데기를 만들고 마스크이자 위장의 도구를 만들며 무엇인가 되고 싶은 ‘척’을 하다가 무엇도 되지 못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2017년의 〈위장 CAMOUFLAGE〉시리즈는 가면 혹은 투구에 다수의 피규어를 붙이고 반짝이는 효과를 동반한 색들로 그 위를 재차 덮은 것이다. 한눈엔 난해한 조형이지만 찬찬히 뜯어볼수록 기성품인 피규어의 디테일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작품 전면을 덮고 있는 색과 광택은 그것들 전체의 친근함과 매력에 힘을 보탠다. 작품에 사용된 가면과 투구는 기본적으로 가리고 방어하며 숨기기 위한 도구이고 피규어는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감정을 느끼며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같은 두 물체의 조합으로 탄생한 것은 이형의 물신(物神)이다. 여기에 피규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연관 지어 보건데 이형의 물신은 작가에게 유의미한 기호이자 ‘존재태’가 된다. 이 새로운 존재태의 기능이 위장이다. 작가의 기록에서 발견한 위장의 목적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것이고 조금 더 유추해 본다면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나를 관찰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살갗의 떨림을 감추고 나의 피로와 표정을, 결국엔 나의 정서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물신은 이렇게 작가를 “가리고 위장하는” 것으로 작가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2019년에도 〈CAMOUFLAGE〉시리즈가 계속됐다. 이러한 현재에서 김승현의 ‘척’과 아이러니가 이어진다. 위장을 하고 있다는 작가 스스로의 자각과 그것을 밝힘으로써 위장을 무효화 시키는 것. 뒤를 이어 위장을 위한 새로운 노력과 또다시 폭로되는 위장의 존재로써 그 또한 무효화 시키는 것. 이것이 김승현이 되풀이 하고 있는 아이러니다. 무엇인 ‘척’하면서도 스스로 그 모습을 고발하는 아이러니의 순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장이 2019년에 들어와 방법을 조금 바꾸었다. 기성의 오브제들을 적극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신과의 연을 갖지 않은 일반적 사물의 사용이 늘어났으며 쌓아 펼치고 배치하는 방법을 사용하며 특유의 리듬을 보이고 있다. 이 리듬의 법칙 혹은 방법의 기원을 묻는다면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 하는 “내 안의 어떠한 본능”과 “원인모를 강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본능적인 시선이나 어떤 강박적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 환유 등으로 복잡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본능과 강박이 현실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제어되지 않는 빈틈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김승현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변화의 폭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2019년의 위장은 큰 조형은 살리면서도 작은 조형은 놓아준다는 특징을 지닌다.

2019년의 〈camouflage〉시리즈는 이전처럼 강렬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작가의 염려 역시 더욱 강하게 무엇인 ‘척’하기 보다는 적당한 수준에서 조형을 마무리 하고 그것을 이루는 각각이 드러나도록 긴장감을 완화해 놓은 느낌이다. 또한 작품 속 오브제의 속성에 대한 변화보다 본래의 속성을 살리면서 작가와 오브제가 만나며 형성된 반응을 구현하는 것에 집중한 듯하다. 그렇다보니 2017년처럼 특수한 기호나 무엇인 ‘척’하지 ‘않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작가는 위장을 위해 조형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조형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가의 화제에, 질문에 주객의 전도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작가가 자신의 어떠한 속성을 드러내고 싶은지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닌 듯하다. 다만 존재하는 것의 속성을 담는 존재태를 만드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었으며 이제는 자신이라는 존재태를 말하고자 함을 짐작할 뿐이다. 

여러 가지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라는 취약함에 ‘자신’라는 나약함을 더한 결과물이 지금까지 김승현의 위장이었다면, 그는 어쩌면 아직 미약하게 살아있는 그것대로의 생명력과 존재의 고집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상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바라보고, 내어놓는 시기마다 무엇을 내놓는지 바라보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면 작가는 위장의 뒤에 숨어서 알아채 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아차리고 세상의 한편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차려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가짜에 저항하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 맞은편에는 가짜를 긍정하기 위해 발휘되었던 인간의 지성 역시 자리한다. 또한 이쪽과 저쪽의 가운데에는 모든 진짜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라는 혼란과 여전히 인간의 가면을 헤아리는 이들도 있다. 여전한 혼란 속에서 이중삼중으로 노출되어있는 우리이다. 어쩌면 나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내가 또다른 차원에 노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운데 집합과 나열의 방법으로 위장을 시도하고 그것을 시각적 효과로 제시하는 것이 작가가 선택한 미술이자 예술을 위한 전략이다. 나아가 필자가 김승현의 살갗과 고민의 질감을 제대로 만져낸 것이라면 현재 그가 찾아 나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바깥의 살갗이다. 

이번 〈가려진 나 · 가리는 나 camouflaged〉전에 출품된 설치작 〈camouflaged W〉(2019)에는 모듈처럼 만들어진 작가의 조각들이 개별적이자 작은 단위로 또 군락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전체를 바라볼 수도 그중에 일부를 각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앞서 주목했던 것처럼 큰 조형 보다는 각각의 작은 속성을 더욱더 정확하게 드러낸다. 특정 브랜드의 상표와 소재의 물성, 이종의 물체에서 돋아나는 또 다른 물체, 이쪽저쪽에 섬처럼 떨어져있으면서도 곳곳을 이어내는 호스와 가짜식물들까지. 이들은 서로의 연관 속에 작품이 되지만 주고받는 연관에서 벗어나도 각자의 본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거시에서 미시를 드나들면서도 자신의 고유함을 잃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조명은 작가의 시선에도 변화가 있음을 나타낸다. 작가가 스스로 ‘가려진 나’와 ‘가리는 나’ 모두를 목격했다면 앞으로의 위장에서는 새로운 시선이 등장할 차례이다. 이같은 시선은 나조차 목격할 수 없는 나의 얼굴이거나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은 나의 얼굴. 어쩌면 제3의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현재 작가는 다중의 정신적 가상이 아닌 실재하는 하나의 표정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리고 숨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자로서 조금 드러내고 표정을 짓는자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물신 역시 변화하기 마련이다. 과거 피규어와 투구가 작가의 물신이었다면 앞으로의 물신은 힘들고 외로울 있는 강인함을 지닌 어떤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가장 모습이 가장 온전한 모습이라는 희망을 바탕으로 삶이라는 머쓱함에 뻔뻔히 맞설 있는 존재다. 작가가 이러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면 그의 작품 속에서 사물들이 살아 있는 모습도 변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다시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살아계시나요?

2019, 이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