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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그래서 어떻게 살아계시나요?

이주희 (미술평론가)


살려고 보니, 살아가려고 보니 마주치는 질문들.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어서 끈질기게 살을 쪼아대고 정신을 갉아먹는 그러한 생각들. 우울도 환희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해 뛰어들고자, 잘 버텨내고자 했던 여러 순간들. 다가오는 것도 떠나가는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인연들. 이것들과 마주하는 ‘나’의 나약함과 이렇게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본들, 의연하게 대해본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삶이라는 아득함마저. “인간이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 이유가 있을까?(들뢰즈)” 문학·미술·음악 등의 장르적인 고민은 둘째로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딛고 기록하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중에 삶이라는 머쓱함이 있다. 이 머쓱함에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김승현의 살갗이다.

김승현은 살갗을 만든다. 투구이자 껍데기를 만들고 마스크이자 위장의 도구를 만들며 무엇인가 되고 싶은 ‘척’을 하다가 무엇도 되지 못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2017년의 〈위장 CAMOUFLAGE〉시리즈는 가면 혹은 투구에 다수의 피규어를 붙이고 반짝이는 효과를 동반한 색들로 그 위를 재차 덮은 것이다. 한눈엔 난해한 조형이지만 찬찬히 뜯어볼수록 기성품인 피규어의 디테일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작품 전면을 덮고 있는 색과 광택은 그것들 전체의 친근함과 매력에 힘을 보탠다. 작품에 사용된 가면과 투구는 기본적으로 가리고 방어하며 숨기기 위한 도구이고 피규어는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감정을 느끼며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같은 두 물체의 조합으로 탄생한 것은 이형의 물신(物神)이다. 여기에 피규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연관 지어 보건데 이형의 물신은 작가에게 유의미한 기호이자 ‘존재태’가 된다. 이 새로운 존재태의 기능이 위장이다. 작가의 기록에서 발견한 위장의 목적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것이고 조금 더 유추해 본다면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나를 관찰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살갗의 떨림을 감추고 나의 피로와 표정을, 결국엔 나의 정서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물신은 이렇게 작가를 “가리고 위장하는” 것으로 작가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2019년에도 〈CAMOUFLAGE〉시리즈가 계속됐다. 이러한 현재에서 김승현의 ‘척’과 아이러니가 이어진다. 위장을 하고 있다는 작가 스스로의 자각과 그것을 밝힘으로써 위장을 무효화 시키는 것. 뒤를 이어 위장을 위한 새로운 노력과 또다시 폭로되는 위장의 존재로써 그 또한 무효화 시키는 것. 이것이 김승현이 되풀이 하고 있는 아이러니다. 무엇인 ‘척’하면서도 스스로 그 모습을 고발하는 아이러니의 순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장이 2019년에 들어와 방법을 조금 바꾸었다. 기성의 오브제들을 적극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신과의 연을 갖지 않은 일반적 사물의 사용이 늘어났으며 쌓아 펼치고 배치하는 방법을 사용하며 특유의 리듬을 보이고 있다. 이 리듬의 법칙 혹은 방법의 기원을 묻는다면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 하는 “내 안의 어떠한 본능”과 “원인모를 강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본능적인 시선이나 어떤 강박적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 환유 등으로 복잡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본능과 강박이 현실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제어되지 않는 빈틈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김승현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변화의 폭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2019년의 위장은 큰 조형은 살리면서도 작은 조형은 놓아준다는 특징을 지닌다.

2019년의 〈camouflage〉시리즈는 이전처럼 강렬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작가의 염려 역시 더욱 강하게 무엇인 ‘척’하기 보다는 적당한 수준에서 조형을 마무리 하고 그것을 이루는 각각이 드러나도록 긴장감을 완화해 놓은 느낌이다. 또한 작품 속 오브제의 속성에 대한 변화보다 본래의 속성을 살리면서 작가와 오브제가 만나며 형성된 반응을 구현하는 것에 집중한 듯하다. 그렇다보니 2017년처럼 특수한 기호나 무엇인 ‘척’하지 ‘않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작가는 위장을 위해 조형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조형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가의 화제에, 질문에 주객의 전도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작가가 자신의 어떠한 속성을 드러내고 싶은지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닌 듯하다. 다만 존재하는 것의 속성을 담는 존재태를 만드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었으며 이제는 자신이라는 존재태를 말하고자 함을 짐작할 뿐이다. 

여러 가지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라는 취약함에 ‘자신’라는 나약함을 더한 결과물이 지금까지 김승현의 위장이었다면, 그는 어쩌면 아직 미약하게 살아있는 그것대로의 생명력과 존재의 고집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상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바라보고, 내어놓는 시기마다 무엇을 내놓는지 바라보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면 작가는 위장의 뒤에 숨어서 알아채 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아차리고 세상의 한편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차려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가짜에 저항하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 맞은편에는 가짜를 긍정하기 위해 발휘되었던 인간의 지성 역시 자리한다. 또한 이쪽과 저쪽의 가운데에는 모든 진짜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라는 혼란과 여전히 인간의 가면을 헤아리는 이들도 있다. 여전한 혼란 속에서 이중삼중으로 노출되어있는 우리이다. 어쩌면 나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내가 또다른 차원에 노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운데 집합과 나열의 방법으로 위장을 시도하고 그것을 시각적 효과로 제시하는 것이 작가가 선택한 미술이자 예술을 위한 전략이다. 나아가 필자가 김승현의 살갗과 고민의 질감을 제대로 만져낸 것이라면 현재 그가 찾아 나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바깥의 살갗이다. 

이번 〈가려진 나 · 가리는 나 camouflaged〉전에 출품된 설치작 〈camouflaged W〉(2019)에는 모듈처럼 만들어진 작가의 조각들이 개별적이자 작은 단위로 또 군락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전체를 바라볼 수도 그중에 일부를 각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앞서 주목했던 것처럼 큰 조형 보다는 각각의 작은 속성을 더욱더 정확하게 드러낸다. 특정 브랜드의 상표와 소재의 물성, 이종의 물체에서 돋아나는 또 다른 물체, 이쪽저쪽에 섬처럼 떨어져있으면서도 곳곳을 이어내는 호스와 가짜식물들까지. 이들은 서로의 연관 속에 작품이 되지만 주고받는 연관에서 벗어나도 각자의 본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거시에서 미시를 드나들면서도 자신의 고유함을 잃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조명은 작가의 시선에도 변화가 있음을 나타낸다. 작가가 스스로 ‘가려진 나’와 ‘가리는 나’ 모두를 목격했다면 앞으로의 위장에서는 새로운 시선이 등장할 차례이다. 이같은 시선은 나조차 목격할 수 없는 나의 얼굴이거나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은 나의 얼굴. 어쩌면 제3의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현재 작가는 다중의 정신적 가상이 아닌 실재하는 하나의 표정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가리고 숨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자로서 조금  드러내고 표정을 짓는자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물신 역시 변화하기 마련이다과거 피규어와 투구가 작가의 물신이었다면 앞으로의 물신은 힘들고 외로울  있는 강인함을 지닌 어떤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그런 존재는 있는 그대로자신의 가장  모습이 가장 온전한 모습이라는 희망을 바탕으로 삶이라는 머쓱함에 뻔뻔히 맞설  있는 존재다작가가 이러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면 그의 작품 속에서 사물들이 살아 있는 모습도 변화할 것이다그렇다면 그때 다시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있을 것이다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살아계시나요?

2019, 이주희